머무를 때 (Inspiration)

이병률 | 사람이 온다

때영 TREE 2022. 1. 25. 07:51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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바람이 커튼을 밀어서
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
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
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
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
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

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
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
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

밤길에서 마주치는
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
미치 그 빛이
사람에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
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

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
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
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
하늘을 올려다 볼 때도
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
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

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
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
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

인생이라는 잎 들을 매단
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
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
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

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
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
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

우리는 저마다
자기 힘으로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
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



[바다는 잘 있습니다] 문학과지성사, 2017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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